정적들에 의해 경원으로 유배되시었던 휘 감 할아버님의 경원에서의 행적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이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僉使崔公行狀 1693. 惠山僉使를 지낸 崔大洋(1559-1598)의 행장. 김기홍의 외조모의 부친이다. 가계와 행적‚ 후손의 사적까지 기록하였다. 최대양의 본관은 慶州이며 5대조인 承仕郞 自潤때 경주에서 경원으로 이주하였다. 祖父 允弼은 司果를 지냈고 父 彦邦은 禦侮將軍이다. 어머니는 朴氏다. 어려서 이곳에 유배온 李戡에게 학문을 배웠다. 25세 되던 해(1583년‚ 선조 16)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1586년(선조 19)에 訓練院奉事‚ 寶化堡權管을 지냈으며 森森坡伏兵將‚ 乫坡知 權管을 거쳤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鞠敬仁의 난 진압‚ 藩胡의 공격 방어‚ 왜적격파 등의 공을 세워 惠山僉使가 되었다. 1595(선조 28)에는 阿山堡 助戰將이 되어 兵使 李英을 도와 制勝方略을 의논하였고 營將이 되어 吉州以北 各邑의 將官을 巡檢하면서 군사들을 계속 조련시키다가 피로가 쌓여 사망하였다. 會寧府使에 追贈되었다. 부인 平康蔡氏는 世麒의 딸이며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克孝는 훈련원 봉사‚ 차남 克悌는 첨사‚ 3남 克忠과 4남 克信은 부장을 지냈다. 장녀는 권관 崔屹에게 시집갔는데 김기홍의 외조모다. 차녀는 첨지 吳漢과 결혼하였다. 증손 仁錫은 武兼宣傳官까지 지냈는데 공의 일기를 정리하고자 하였으나 일찍 죽었다. 공은 1583년(선조 16)부터 1597년(선조 30)까지 15년 동안의 天災時變과 吉凶弔慶‚ 藩胡 및 왜적과의 전투에 관한 내용을 매일 기록한 일기를 남겼다고 한다. 공은 나라가 위급할 때 태어나 禮로써 官長을 대하고 義로써 직책을 수행하였으므로 主將이 높이 평가하여 兵使에 의망하려 하였는데 나이 40에 불행히 단명하였으니 지극히 애석하다고 서술하였다.
惠山日記跋 崔大洋(1559-1598)이 작성한 일기 ≪惠山日記≫에 붙인 발문이다. 상자에 보관된 채 계속 전해지던 일기를 그의 증손인 宣傳官 仁錫이 다시 베끼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한 채 죽고 그 아들 挺北도 일찍 죽어 집안에는 이제 정북의 유복자만 남아 있으니 崔氏 宗家에서 공의 자손에게 대대로 전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寫藏惠山日記序 崔大洋(1559-1598)이 작성한 ≪惠山日記≫를 필사하여 崔氏 宗家의 자손들에게 주면서 대대로 전하기를 바란 글. 이 일기는 1583년(선조 16)부터 10여년 동안의 時事를 날마다 자세히 기록한 것이니 함경도 지방의 事蹟을 아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함.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이석: 출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e-kyujanggak.snu.ac.kr/MOK/CONVIEW.jsp?type=HEJ&ptype=list&subtype=mj&lclass=01&mclass=&sclass=&ntype=mj&cn=GK07772_00 -[04/29]- 이석: 흔히 권신과 척신에 의해 귀양간 후의 공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비록 단편적이나마 공께서는 유배지인 경원 변방에서 후진 양성과 학문 전달에 진력하셨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04/29]- ###: 정말 귀하신 자료입니다. -[11/03-12:40]-